[100세 시대 신간] 구지은 <최초는 두렵지 않다>

조진래 기자 2024-01-10 07:44:00

이 책의 부제는 ‘구지은, 아버지 구자학을 기록하라’이다. 막내 딸이 아버지 고 구자학 전 아워홈 회장의 일생과 경영 철학 등을 정성껏 담아 헌정한 책이다. 저자 스스로 붙인 서문의 제목이 ‘창업가 구자학론’이다. LG가 일원임에도 전문경영인처럼 평생을 ‘최초’에 헌신했던 고인의 삶을 되짚어보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 인간 구자학
구 회장은 경남 지수면에서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6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미국 오하이오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당시 삼성물산 소유였던 한일은행 행원부터 시작해 동양TV 이사, 금성사 상무, 금성통신 부사장을 거쳤다. 그리고 광업제련 대표를 시작으로 호텔신라 초대사장, 중앙개발(삼성물산)과 럭키(LG화학), 금성사(LG전자), 금성일렉트로닉(LG반도체), LG건설(GS건설)까지 30년 동안 CEO로 재직했다. 

미디어와 호텔, 레저, 화학, 반도체, 전자, 건설 등 모든 영역을 맡아 본 ‘전방위 CEO’였다. 신라호텔을 짓고 자연농원을 만들었으며, 화장품을 처음 해외에 수출하고 산유국에 석유화학 기술을 팔았다. 유럽에 TV 공장을 짓고 반도체 사업도 개척했다. 모두가 ‘처음’이었다. 저자는 “고인은 화학과 전자, 반도체, 건설까지 LG그룹의 핵심 기반을 다진 전설적인 경영자였다”면서 “한국 경제의 양대 산맥인 LG와 삼성을 오가며 새로운 ‘업’을 창출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구 회장은 70세 나이에 LG유통의 가장 작은 아워홈 사업부를 분사 독립해 설립했다. 그리고 작은 급식 사업부에 불과했던 회사를 조 단위 매출의 대형 종합식품기업으로 키워냈다. 매년 6월 일본에서 열리는 푸마 식품공업박람회에 90세가 다 될 때까지 참석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 아버지 구자학
생전에 구 회장은 ‘절약’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옛날 달력을 손바닥 크기로 잘라 뒷 면을 메모지로 쓰거나 보고서 이면지를 4분의 1 크기로 잘라 메모지로 쓰곤 했다. 구 씨 가문의 유교적 전통대로 엄격한 가풍에 충실했다. 특히 자식들을 직원들보다 더 엄격하게 대했다고 한다. 남 탓 하지 말고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이겨내라고 가르쳤다. 

구 회장이 삼성가의 이숙희 여사와 결혼하게 된 것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구인회 LG 창업주의 각별한 인연 덕분이었다. 이 회장이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들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딸을 맺어주자”고 했던 언약을 지킨 것이다. 지수보통학교에서 만났던 지기가 사돈까지 된 것이다. 

구자학 회장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 김치 담그는 유학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맛이 너무 좋아 유학생 사회에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종종 돼지갈비찜을 만들어 모임에 나가, 현지인들에게도 크게 어필했다고 했다. 저자는 “오래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아워홈을 업으로 할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적었다.
◇ 비즈니스맨 구자학
삼성 이병철 회장은 사위의 인간 됨됨이와 사업적 능력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새로 시작하는 일을 자주 그에게 맡겼다. 1964년에는 라디오서울과 동양TV의 이사를 맡겼고, 1973년에는 호텔사업을 시작하면서 만 42세 나이에 그를 호텔신라 사장직에 앉혔다. 이듬해에는 중앙개발 사장까지 겸직케 했다. 1976년에는 자연농원(현 에버랜드)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시켰다.
그가 고향인 LG로 돌아온 것은 1980년이었다. 그가 럭키의 대표이사에 취임했을 때, 안팎에서 ‘파격’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럭키는 그룹의 모체이자 핵심인 회사였기에, 삼성에서 오래 근무한 그에게 대표직을 내주었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는 표시이자 더 큰 시험의 장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지금 LG화학의 ‘전설’이 되었다.

1981년에 나온 국민 치약 ‘페리오’와 1984년 LG의 1호 화장품으로 선보인 ‘드봉’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이름도 그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화장품 시장 진출에는 안팎으로 반대가 엄청났지만 그는 “치약 하나로는 기업도 클 수 없고, 나라도 클 수 없다”며 화장품이 피부보호제이자 건강용품이라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국내 화장품 시장을 양분 중인 LG생활건강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아버지는 ‘기업은 상품이 아니라 산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구 회장의 핵심 경영 철학은 ‘스케일 업’이었다. 그 첫 작품이 럭키였다. 그는 생필품만을 만들던 이 회사를 석유화학과 정밀화학, 유전공학까지 망라하는 대형 종합화학기업으로 키워냈다. 사표를 써놓고 투자제안을 할 정도로 모든 것을 스케일 업에 쏟아 부었다. 1986년 금성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창원 백색가전 공장을 2배로 키웠을 때도 똑같았다.

구 회장은 소비자보다 시장을 먼저 찾는 사람이었다. 시장이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어 냈다. 당시로선 무모하다던 해외진출도 겁내지 않았다. 럭키 사장이던 1984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 진출했고, 유전공학이란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에 미국에 럭키바이오텍연구소를 만들어 LG바이오 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1987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서독에 컬러TV·VTR공장을 지었고, 1989년에는 베트남 공산화 후 첫 현지 진출을 이뤄냈다.

◇ ‘맛 오너’ 구자학
고희(古稀)를 맞은 구 회장은 LG유통의 식품사업부를 분리 독립해 아워홈을 설립했다. LG에서는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시작했다. 그룹 주력 사업의 기초를 일군 주역이었음에도 자산의 몫 하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룹의 오너 일가가 7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너’가 된 것이다. 구 회장에게 아워홈은 ‘덕업일치’였다. 자신이 사랑 하는 ‘음식’으로 일종의 덕업일치 창업을 한 것이다. 분사 당시 2000억 원 규모에 불과했던 아워홈은 9년 만인 2009년에 매출 1조 원을 찍었다. 

그는 소문난 미식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맛의 달인’이었다. 돼지고기를 어떻게 삶았고 어떻게 숙성시켰는지, 생산은 왜 그렇게 말렸는지 등을 끊임없이 묻고 개선하려 했다. 토요일 점심이면 혼자 운전해 맛집 탐방을 다녔다. 저렴하고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짜’라고 여겼다. 싸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아워홈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철학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구 회장은 ‘소스의 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한식 메뉴는 아무리 정해진 레시피가 있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들쭉날쭉인 때가 많은데, 그는 그 원인이 소스에 있다고 간파했다. 균일한 맛을 내는 한식 소스를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다는 아이디어는 ‘혁신’이었다. 맛의 표준화, 조리 공정의 무인화 및 자동화는 급식을 ‘산업’으로 만든 ‘획기적 혁신’이었다. 그의 혀 끝에서 탄생한 대표 메뉴가 수제 햄 ‘샤퀴테리’와 묵은지·갈치김치·청잎김치, 아삭섞박지, 동치미물냉면, 진주식 속풀이국이다.

구 회장은 일찌감치 ‘물류’의 개념을 도입했다. 물류 혁신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도 전인 2000년대 초반에 직접 혼자 전국을 돌며 발 품을 팔아 14개 물류센터와 9개 제조공장, 4개 식재가공센터를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식품기업을 일궈 냈다. 지금 아워홈은 업계에서 ‘물류사관학교’로 통한다. 

◇ 구 회장의 경영 철학
저자는 ‘학회장의 경영 플레이북’이라는 이름으로 구 회장의 평소 경영철학 19가지를 소개했다. 늘 탐구하고 배우려 했다는 의미에서 ‘학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첫째, 남이 하지 않는 것, 못하는 것을 한다. 구 회장은 평생 이 만트라(주문)를 자신과 조직에 되뇌고 실천했다. 모든 것을 맨 땅에서 일궈야 했던 산업화 1세대로서 그의 ‘창의’에 대한 집념은 곧 생존을 위한 길이었다. 둘째, 최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최초’가 되는 두려움을 기꺼이 감당했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직원들은 엄하게 질책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는 임원은 임원 자격이 없다고 했다.

셋째,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크게 투자한다. 직원들이 재정 걱정을 하면 “돈 걱정은 하지 마라. 회사에 이익이 되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가 필요한 곳이라면 주저 없이 투자하라. 이익을 내서 갚으면 된다”며 독려했다. 넷째, 기업은 상품보다 산업을 만들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시선을 최소 10년에서 20년 후에 두고 움직였다. 다섯째, 반대는 이기는 것이 아니다, 더하는 것이다. 그는 반대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불러다 이해시키고 보완할 점을 경청했다.

여섯째, 가봤냐, 써봤냐, 해봤냐, 먹어봤냐. 그의 지독한 ‘현장주의’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는 직접 보고 파악한 후 바로 결정을 내리곤 했다. 일곱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최고전문가다. 임원의 답이 충분치 않으면 그는 곧바로 실무자와 대화하거나 실무자를 참석시킬 것을 당부했다. 여덟째, 연구소부터 크게 만든다. 국내 최초로 유전공학 연구조직과 시업을 만든 것이 구 회장이었다. 2000년에 아워홈을 창업했을 때도 식품연구원부터 만들었다. 

아홉째, 사람 먹고 사는 일이 중하다. 그의 경영철학 기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잘 사는 것, 건강하게 잘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윗사람이 더 알아야 한다. 그는 맡기면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직원들이 모른다고 해도 질책하지 않고 믿고 맡겼다. 그러면 언젠가는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기다려주었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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