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문인협회에서 문학기행으로 부여 ‘신동엽문학관’을 다녀왔다. 신동엽 시인이 살던 동남리 언덕마을은 초가지붕 두 채 외에는 농사 지을 땅도 없어 마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다.
신동엽의 발자국이 찍혀서 길이 되고 민가가 들어서면서 ‘신동엽길’이라는 주소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길에는 신동엽이 쓴 시와 소설의 구절구절 문구가 50m 아크릴판에 새겨져 문학관임을 안내한다.
생가 지붕에 하얀 박꽃과 콩 담장 울타리 지붕에 호박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어 정겹다. 방안 중앙 벽에는 그가 배낭을 맨 채 휴식을 취하며 시상을 떠올리며 사진이 걸려 있다. 그가 쓰던 책상, 전화기, 문갑, 탁자 등 생활용품이 집필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신동엽문학관은 부여가 자랑 하는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건축가 승효상이 신동엽의 시 정신에 부합하는 건축예술을 구현해, 여타 문학관들에 비해 아름답다.
이 계절의 시, 진달래 산천, 별 밭에서, 바람의 경전 등 시인과 관련된 것을 모티브로 해 더욱 정겹다. 유물과 유품이 많아 탐방객들의 발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문학관 옥상에 올라보니 부여 시내가 내다 보이고 부소산 전경과 백마강이 넘실거린다.
신동엽은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해 독서에 힘쓰면서 소양을 키웠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헌 책방을 열어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을 만나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폐결핵을 앓으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보내고는 부여 생가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했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4·19 혁명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를 써 ‘4.19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해 애절하다.
정운일 시니어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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