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니어 타운’이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들
2024-01-26
마이클 델은 ‘델 테크놀로지’의 창업주이자 회장이다. 모두가 기업상장으로 거액을 만지려 할 때 그는 ‘혁신적 성장’을 위해선 상장기업이 걸림돌이 된다며 오히려 상장회사를 비상장회사로 전환했다.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과 벌였던 피 말리는 경영권 다툼은 경영인이라면 누구나 참고할 만 하다. ‘혁신’을 향한 그의 두둑한 배짱과 흔들이지 않은 초심이 그를 세계적인 리더로 성장시켰다.
◇ ‘기업가정신’에 나이 많고 적음은 없다
델은 10대부터 기업가정신을 보여주었다. 일찍부터 컴퓨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이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애플Ⅱ’라는 컴퓨터를 손에 놓으면서 컴퓨터 사업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이 제품을 개발한 스티브 워즈니악으로부터 “사람들이 이제 PC를 통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 산업에 대한 확산을 굳혔다. 텍사스주립대 의대에 합격했지만 그의 관심은 오로지 컴퓨터였다.
때 마침 IBM이 내놓은 PC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문량이 밀리면서 지역 소매점들이 제 때 물건을 공급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델은 이 때 번득이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다. 공급이 여유있는 도시에서 PC를 여러 대 구입해 물량이 달리는 곳에다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20세가 되기도 전에 그는 거의 매주말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물량을 공급하고 때로는 컴퓨터 업 그레이드를 해 주며 비즈니스에 눈을 뜨게 된다. 당돌하게도 이 때부터 그는 세계 최고 기업 IBM과 경쟁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19세에 ‘델 컴퓨터 코퍼레이션’을 세웠다.
◇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라
청년 CEO 델은 회사 설립 첫 해인 1986년에 33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주문조립식으로 PC를 만들어 주문 당일 출고하는 비즈니스가 큰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미 두 가지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나는, 소매점보다 싼 값에 직접 PC를 판매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객들이 원하는 주변기기까지 제공하고 업 그레이드 모델을 부가가치를 높여 파는 갓이었다. IBM PC의 성능을 개선하면서 가격은 오히려 낮추었으니 인기를 끌 수 밖에 없는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이런 경험은 창업 초기 ‘터보’라는 이름의 첫 델 제품을 선보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통신 판매 및 주문 판매라는 새로운 도전도 한 몫 했다. 인텔의 8088 CPU와 640킬로바이트의 램과 360킬로바이트의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한 제품을 비슷한 사양의 IBM 컴퓨터에 비해 절반 가격으로 공급했다. 특히 무료방문 서비스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투자은행들의 투자를 유치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 시장 흐름을 정확히 읽어라
스마트 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세간에는 ‘스마트 폰이 곧 PC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했다. 하지만 델은 늘 낙관적이었다. 엄청난 시가총액과 점점 악화되는 PC 시장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사의 가능성을 믿고 도와줄 조력자들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무엇보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끌던 스마트 폰과 태블릿이 ‘감히’ PC를 대체하진 못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만큼 비즈니스 시장에서 PC의 가치는 견고하며, 결국 고객들은 스마트 폰으로 정보를 읽고, 정작 일은 PC로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EMC와의 역사적 합병은 델의 정확한 시장 판세 해독 능력을 웅변해 주었다. 가상화 분야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가진 강소기업 VM웨어를 인수한 EMC와의 합병을 통해 델은 급성장하는 서버 사업을 선점할 수 있었다. 당시 시가총액이 무려 590억 달러에 이르던 ‘공룡’ EMC를 주식 맞교환 방식으로 얻으면서, 델의 서버 사업과 EMC의 스토리지 사업이 결합된 거대 인프라가 구축된 것이다.
그는 이른바 ‘데이터 대폭발’을 예견했다. 델을 필수적인 IT 인프라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조립 PC를 만들던 회사를 IT 인프라 분야를 주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변모 시켰다. 델은 “디지털의 미래는 함께 작동하는 클라우드의 집합”이라며 엄청난 금액을 클라우드 구축에 투입하고 40억 달러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 ‘상장’만이 능사가 아니다
델은 자신의 이름을 딴 ‘델 코퍼레이션’의 상장을 결정한다. IBM이 특허 침해를 들어 딴죽을 걸긴 했지만 특허 사용료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마침내 주당 8.5달러에 나스닥에 ‘DELL’이라는 이름으로 상장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2010년 닷컴버블 붕괴 이후 비공개 기업으로의 전환을 결심한다. 델이 비공개기업이 되려면 상장폐지 절차와 함께 일반 주주들의 모든 주식을 사들여야 했다. 무려 250억 달러가 필요한 난제였다. 델은 상장기업에 가해지는 단기성과 압박 등에서 자유롭고 싶어 했다. 다행히 이사회도 그의 뜻에 긍정적이었다.
델은 비공개기업으로 회사를 전환해야 연구개발 투자와 영업 역량이 극대화되어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기업가 정신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시장점유율을 크게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PC와 서버의 가격 결정을 보다 공격적으로 할 수 있고 그래야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주주들에게 쳐줄 주당 가격 산정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비상장으로의 전환을 이뤄냈고 이후 회사는 전혀 새로운 기업으로 탈바꿈한다.
◇ 부당하고 불명확한 반대에 굴하지 않는 뚝심이 필요하다
주주들과의 가격협상이 지연되면서 델의 비공개기업 전환 소식이 드러났다. 월스트리트저널나 뉴욕타임즈 등 유력 매체들이 그 위험성을 지적하며 ‘대단한 도박’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델의 경영 능력을 흠집 내려는 온갖 험담도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델이 누누히 ‘문제를 일으키는 기회주의자’라고 깎아 세우는 칼 아이칸과 맞닥뜨리게 된다. 칼은 회사를 그대로 상장기업으로 놔 두라 면서도 자신이 델 발행주식의 최대 25%까지 인수할지 모른다고 겁박을 했다.
델은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칸이 주주 권리를 위해 싸우는 외로운 십자군처럼 보이도록 스스로를 포장했음을 널리 알렸다. 그의 진위를 파악해야 하겠다며 어느 날 갑자기 직접 그를 찾아가 담판을 짓기까지 했다. 그날 만남에서 델은 칼이 회사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비상장 전환을 밀어 부쳤다. 막판에는 ‘발행주식 중 소수 주주의 과반이 찬성해야 한다’는 특별 규정이 발목을 잡았지만, 주주총회를 연기하면서까지 정공법으로 나선 끝에 결국 2013년 8월에 주당 13.83달러 합의를 이끌어 냈다.
◇ 연관 분야의 능력자들과 교우하라
델은 창업 초기에 스티브 워즈니악의 도움을 받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한창 회사가 성장기를 맞았을 때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그의 소중한 파트너이자 멘토가 되어 주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사업 파트너이자 협력자였다. 델 컴퓨터의 운영체계(OS)를 만들오 준 것도 마이크로소프트였다. 애플의 혁신을 만들어 낸 스티브 잡스는 신뢰하는 동료에 더 가까워 졌다. 사업 파트너로서는 제한이 있었지만 가끔 산책하며 일과 인생을 논하며 델의 정신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세계적 경영자들과 어울린 덕분에 그도 ‘선한 기부’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내인 수잔과 함께 설립한 ‘마이클앤드수잔델재단’은 미국과 인도, 남아프리카의 도시빈곤 지역에서 큰 역할을 한다. 교육과 건강,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개선에 중점을 두고 헌신하고 있다. 재단은 미국 저소득 중고생들에게 대학 입학 지원도 해 준다. 남아프리카에서도 ‘델 영 리더스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등 매년 35만 명의 저소득층 대학생들을 돕는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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