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이대로 괜찮은가

이의현 기자 2024-05-31 09:13:12

지난해 7월부터 ‘사전지정운용제도’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도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디폴트 옵션제도는 해외에서 시행되고 있는 그것과 많이 다르다. 전문가 그룹에서는 꾸준히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었다.

마침 국내 최고의 은퇴 전문가인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이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에 올린 기고문에서 국내에서 시행 중인 디폴트 옵션제도의 미비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촉구해 눈길을 끈다.

김 고문은 일단, 개인의 의사표시가 없으면 투자상품이 자동으로 선택되는 것이 디폴트 옵션의 기본인데, 우리나라의 사전지정운용제도는 근로자가 사전에 적격상품을 지정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원리금이 보장되는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상품 가운데 개인이 하나를 우선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당초 디폴트 옵션의 본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김 고문은 “디폴트 옵션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지 않아도 최적의 연금 상품을 내게 준다’는 데 기반을 두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우리처럼  개인이 적격상품을 선택을 해야 한다면 디폴트 옵션의 전제를 위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선택해야 하는 상품 가운데는 생애자산관리에 부적합 한 원리금 보장 상품(초저위험)도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이유로 2023년 말 현재 사전지정운용제도 가입자의 90%가 낮은 금리의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이에 김 고문은 “우리나라에서는 디폴트가 노후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을 전문가들이 적격성 심사를 통해 검증했다는 점에서 나름 제도적 측면에서 진일보한 측면은 있지만,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하는 비중이 9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다면 적격성 심사의 실익도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원리금 보장 상품은 상품의 차별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며 “10% 정도의 원리금 비보장 상품에서 적격성 심사의 긍정적인 면이 나타날 따름”이라고 꼬집었다. 

김 고문은 “일각에선 중위험과 고위험 상품의 수익률을 확실하게 높이면 사람들이 이를 선택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주식수익률이 가장 좋은 미국도 이것이 안 되기에 401(k)에 디폴트 옵션을 도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단기적 관점을 가진 연금 가입자들이 장기적 미래를 보고 출렁이는 시장을 선택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의 퇴직연금 401(k)는 퇴직연금에 가입할 때와 포트폴리오를 선택할 때 디폴트 옵션(자동가입)을 채택하고 있다. 근로자가 별다른 의사표시를 않으면 401(k)에 자동 가입된다. 퇴직연금상품도 자동으로 적격 디폴트 상품이 선택된다. 401(k)의 디폴트, 즉 초기값이 ‘퇴직연금 가입’과 ‘적격 디폴트 상품 가입’인 셈이다. 본인이 가입하기 싫으면 의사표시를 하면 된다.

덕분에 디폴트 옵션(은 401(k)의 가입률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서 고용 3개월 후 가입률과 3년 후 가입률이 각각 90%와 98%로 급등해, 퇴직연금 가입 시기를 앞당기고 가입률을 극적으로 높이는 효과를 보였다. 운용상품도 생애 자산 배분에 최적인 TDF(Target Date Fund)를 선택하게 되면서, 근로자는 아무 선택을 하지 않았음에도 최적의 결과를 보였다. 디폴트가 미국 근로자의 노후를 구한 것이다.

김 고문은 “우리나라에서 사전지정운용제도를 도입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원리금 보장 상품 선택은 여전히 견고하다”면서 “우리나라 디폴트 옵션은 제도를 도입할 때 모나지 않으려 하다 보니 회색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이의현 기자 yhlee@viva208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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