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6일 현충일 맞아 다채로운 문화 체험행사 펼쳐
2025-06-05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그는 26세에 영국 케임브지리대 최연소 수학 교수가 되고, 44세에 최고의 과학자 반열에 오른 천재 과학자였다. 그는 특히 50대에 조폐국에서 고위직을 맡으면서 과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금융, 재테크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흑역사를 남겨 주목을 끌었다.
방현철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가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에 과학천재였던 뉴턴이 투자천재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한 사실을 전하면서 그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교훈에 관한 글을 올려 눈길을 끈다.
방 기자는 뉴턴의 인생이 영국 조폐국 일을 하기 전인 50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다. 당시 조폐국은 금화, 은화 등의 발행을 책임진 곳이었다. 아직 중앙은행이 없던 시절이라 이곳이 사실상 통화 공급과 통화 가치 유지의 막중한 업무를 했는데, 뉴턴은 53세에 조폐국 감사관에 이어 56세에 최고위직인 조폐국장 감투를 쓰게 되었다.
당시 교수 연봉이 100파운드일 때 조폐국장 연봉이 1500파운드였다고 한다. 뉴턴은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국채나 주식 등에 투자해 연간 1000파운드의 추가 소득도 올렸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1인당 연소득이 10파운드에 불과했던 때였으니 단기에 엄청난 부자가 된 것이다. 연봉과 투자 성과를 합하면 적어도 당시 상위 1% 부자에 들었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는다.
당시만 해도 많은 부자들의 관심사가 부동산이었던 데 반해 뉴턴은 금융상품에 빠져 있었다. 때 마침 당시에는 영국에서 이른바 ‘금융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1688년 명예혁명을 계기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한 국채 등이 생겨나고 잉글랜드은행이나 남해회사 등이 속속 생겨나며 금융 부흥기가 활짝 만개하기 시작할 때였다. 뉴튼도 국채와 주식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694년에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이 영국 국채를 인수하는 대신 발권력을 부여받게 되면서 뉴턴은 66세이던 1709년부터 잉글랜드 은행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때 큰 역할을 한 것이 1711년 설립된 남해회사였다. 빚을 주식으로 바꿔주는 출자전환을 해 주는 사업모델로 성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1720년 역사상 최초의 주식 ‘버블(거품)’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뉴턴은 영국 국채, 잉글랜드 은행 주식, 남해회사 주식 등 당시의 우량 자산에 분산 투자했었는데 1720년 4월에 보유 중이던 남해회사 주식을 갑자기 전략 매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업의 지속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100파운드 정도에 사서 350파운드 정도에 팔아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린 셈이다.
문제는 일반 주식 투자자들은 뉴턴과 달리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남해회사가 많은 국가 부채를 떠안아도 계속 많은 배당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무역독점권까지 부여받자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는 투자 대상으로 본 것이다. 주가는 폭등세를 보였고 어느 새 1000파운드까지 육박하게 되었다. 하지만 냉철한 과학자 뉴턴도 역시 사람이었다.
주식을 팔고 나서 주가가 폭등하자 700파운드 무렵부터 다시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주가가 꼭지를 지나 조금씩 떨어지는데도 계속 사들였다. 갖고 있던 국채까지 팔아 ‘몰빵’ 했다. 그 역시 FOMO(Fear of Missing Out, 나만 소외된다는 두려움)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 해 9월에 남해회사의 거품이 터져 버렸고, 주가는 80% 넘게 폭락해 그야말로 뉴턴은 ‘쪽박’을 차게 되었다.
뉴턴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남해회사 주식을 뒤늦게 상투 잡고 사들인 바람에 최소한 2만 2600파운드를 잃은 것으로 추정됐다.
방현철 기자는 "뉴턴은 생을 마감하던 순간까지 잉글랜드 은행 주식과 남해회사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다만, 주식의 절반은 채권으로 바꾼 상태였다. 늦었지만 분산 투자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이의현 기자 yhlee@viva208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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