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채 서울의대 명예교수는 ‘죽음학 전도사’로 불린다. 서울대 의대 출신인 그는 모교에서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로 재직하며 240여 편의 의과학 논문을 SCI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가 정년퇴임을 2년 앞둔 2008년에 방광암 진단을 받은 것을 계기로 죽음학 연구에 천착해 연구와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이필재 인물스토리텔러(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가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에 정 교수와의 인터뷰를 올렸다. 죽음을 준비하며 맞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요약 소개한다.
- 죽음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밝혀졌다고 보나. “죽음에 관해선 이미 알려진 사실도 있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 우리가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죽음의 실체다. 죽음에 대해선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있다. 하나는 소멸로서 인간은 일회성 존재로서 수명이 다하면 홀연히 사라진다는 입장, 다른 하나는 죽음을 통과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옮겨간다는 ‘죽음관’이다. 거의 모든 고등 종교가 사후세계에 대해 말하지만,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도 다수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사후세계로 옮겨간다는 죽음관을 갖게 되면, 죽음을 더 이상 괴롭고 끔찍한 소멸이 아니라 마지막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이게 된다.”
- 우리 사회의 죽음의 질이 어떻다고 보나. “10년 전 실시한 국제 비교 조사에서 30위로 바닥권이었다. 1위가 영국이었는데, 영국인들이 남 달라서가 아니라 영국 정부가 나서서 죽음에 대한 교육 등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 죽음의 질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우리나라가 특히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 없이 편안히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우리는 진통제를 너무 적게 쓴다. 말기 암 환자조차 ‘중독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가족들이 마약성 진통제 사용을 주저한다. ”
- ‘죽음학’ 연구가로서 어떤 죽음을 맞기를 권하는가. “‘당하는 죽음’ 말고 ‘맞이하는 죽음’이다. 그러자면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죽음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심지어 혐오할 게 아니라 어떤 죽음을 맞이할 건지 평소 관심을 갖고, 책도 보고 강의도 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그러니 죽음을 맞는 게 너무 힘든 것이다.”
-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가. “일단 통증 조절을 잘해 고통이 심하지 않아야 한다. 연명 치료 여부 등 죽음과 관련한 의사 표시·결정을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타인에 대한 나름의 기여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껴야 한다.”
- 병원에서 맞는 죽음도 객사(客死)라고 하셨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가족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집에서 죽음을 맞으려면 무엇보다 죽음을 어떻게 맞을 건지 평소에 생각해 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죽음을 준비하면 된다는 것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많은 죽음이 뒤통수를 치듯 닥친다. 준비되지 않으면 경황 없이 황망한 죽음을 맞는다.”
- 죽음을 언제부터 준비해야 하나. “이를수록 좋다고 본다. 초등학생 때 반려동물의 죽음부터 교육하는 게 좋다. 독일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죽음 교육을 시작하고, 고 2 윤리시간에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어떻게 할 건가’를 주제로 토론을 한다. 일본의 어느 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1년에 12번 죽음 교육을 했다. 반려동물의 죽음, 시한부 선고, 자살, 장기이식, 죽음에 대한 공포, 사후세계 등을 다루었다. 이 교육 후에 교내 폭력, 집단 따돌림, 자살 등이 30% 이상 줄어들었다. 아이들에게 죽음 교육을 하면 염세적이 되고 자살이 늘어날 거라고 걱정하는데, 이는 몰이해한 탓이다.”
-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이라는 저서를 통해 전하시려 한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책의 초판 표지 그림이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뒷 표지엔 그 사람이 문으로 들어가는 그림을 실었다.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이다.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이다. 이동하는 사람의 영혼은 고유한 주파수 내지는 진동수를 가진 에너지체로 볼 수 있다. 수많은 정보가 입력돼 있는 에너지체 라고 볼 수 있다. 삶에서 얻은 지혜, 나름대로 쌓은 수양, 타인에 대한 배려, 친절과 선행이 전부 기록된다고 본다. 불교에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빈손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 본인의 죽음 준비 중에 주변에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해야 한다. 사전장례식도 좋다고 본다. 제가 아는 정형외과 개업의는 아마추어 사진가였는데, 70여 세에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사진 전시회를 했다. 일종의 사전장례식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완화의료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저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4가지 말>에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으로 이 네 마디를 제안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이다. 사랑 하는 이들과 행복한 삶을 꾸리는 말들이기도 하다. 만일 만나서 용서를 구할 수 없다면 마음으로라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어떤 것 들을 준비해야 할까. “유언장,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장기기증희망등록 등은 권할 때 작성해야 한다. 저도 암 환자이지만 암 환자에게 유언장 이야기 꺼내면 ‘나더러 지금 죽으라는 소리냐’고 격하게 반응한다. 연명의료의향서는 본인이 작성을 하고도 가족에게 끌려다니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사람이 아직은 많지 않다는 반증이다. 연명 치료를 받지 않으려면, 평소 가족과 대화할 때 화제로 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해 받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게 좋다.”
- 가족 뜻에 따라 본인 의사에 반해 연명 치료를 하는 것은 제도가 미비한 탓 아닌가. “그래서 당사자의 연명의료의향이 지켜지려면, 의료진이든 가족이든 본인 의사를 무시하면 벌금을 물린다든지 처벌하도록 법을 강화해야 한다.”
- 암 등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병으로 투병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죽음의 특징 중 하나가 예측 불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암은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한 병이다. 여명(餘命)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고, 조기 발견해 완치될 수도 있다. 암 가족력이 없어도 요즘은 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가장 높다. 당사자는 물론 가족도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죽음 준비다. 자신의 죽음이 가족에겐 죽음을 교육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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