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니어 타운’이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들
2024-01-26
박정부 회장은 ‘국민가게’로 불리는 다이소의 창업주다. 그는 45세에 늦깎이 창업을 해 ‘1000원의 성공신화’를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000원 짜리 제품을 그 2배, 3배 품질로 만들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음으로서 연 매출 3조 원 대의 기업을 키웠다. 전국 1500여 개 매장에서 매달 600개 이상의 신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박 회장은 다이소의 성공 요인을 ‘생활용품 균일가숍’이라는 ‘업’의 본질에 충실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 가격보다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늘 고객을 중심에 놓는 경영관이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만든 것이다. ‘국민가게’를 일군 그의 다음 목표는 ‘가족 복합쇼핑몰’이다.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복합공간을 만드는 것이 박 회장의 작은 소망이다.
◇ “가격보다 가치를 보라”
박정부 회장은 ‘마진’보다 ‘만족’을 우선시 한다. 가격 대비 최소 2배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제품은 아예 내놓지 않는다. 초창기 마진률을 1~2%로 시작했다. 모두가 실패를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원가에 적정 이윤을 붙여 판매가를 결정하던 기존 방식을 거부하고,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가격을 먼저 결정하고 난 뒤 그 가격에 맞출 수 있는 상품을 개발했다. 가격을 먼저 정하고 상품을 찾은 셈이다.
싸고 좋으니 입소문을 타고 고객이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원가 요인은 과감히 제거하고 꼭 필요한 가치만 담았다. 전국 방방곡곡, 전 세계 생산공장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짓고 가격을 낮출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함께 찾았다. 그는 “다이소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고객만족 극대화’”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박 회장은 “상품에 ‘혼’을 담으라”고 늘 독려한다. ‘저가는 싸구려’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고객에게 놀라운 ‘가치’로 감동을 주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다. 상품 하나 하나에 정성을 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혼을 불어넣지 않으면 불량품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저한 품질관리가 그에겐 고객과의 가장 중요한 악속이다. 상품력으로 승부를 거니, 가격 할인이나 끼워 팔기 혹은 판촉 행사도 다이소에는 일체 없다.
◇ “품질이 최선이다. 그래야 고객이 다시 찾는다”
소비자들이 다이소를 찾는 이유는 ‘가품비’, 즉 가격 대비 품질 때문이다. 다이소는 1000원 균일가 제품을 상당 수 유지하고 있다. 제품 가격대도 500원부터 1000원, 1500원, 2000원, 3000원, 5000원 등 6단계로 고정시켰다. 금융위기, 코로나 위기에 원부자재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도 이 원칙을 고수했다. ‘균일가 제공’이라는 기업의 핵심 가치를 고수하고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가격 인상 요인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품질을 낮추고 가격을 올리는 꼼수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품질에 천착하는 것은 창업 초기의 아픈 교훈 때문이다. 일본의 한 주류 도매업체로부터 고객 사은품으로 제공할 유리 재떨이 5000개를 처음으로 주문받았다. 드디어 돈을 벌게 되었다는 희망에 납기를 억지로 맞추느라 후공정 열처리에서 미스가 생겼다. 결국 담배 불에 재떨이가 깨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빚어졌고 제품은 전량 폐기됐다. 그 때 박 회장은 ‘작은 것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박 회장은 “상품 1개 불량은 고객에게 100% 불량이다”라고 늘 말한다. 구매한 상품 1개가 불량이면 고객 입장에선 100% 불량이라는 것이다. “1000원짜리 상품은 있지만 1000원짜리 품질은 없다”고 강조도 한다. 싼 제품이 불량이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 회사 전체의 신뢰까지 무너트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매장 담당자들에겐 스스로 ‘최후의 품질 검사원’이 되라고 다그친다.
◇ “늦었다고 포기 말라.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것에서 배워라”
박 회장은 창업가로는 많이 늦은 마흔 다섯에 창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생산 책임자로 잘 다니던 공장에서 하루 아침에 사표를 쓰게 된 후 동생이 하던 일본 해외연수 사업을 돕다가 아성다이소의 전신인 ‘한일맨파워’를 설립했다. 평소 무역상의 꿈을 꿔왔던 터라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다. 마침 일본에서는 ‘100엔숍’이 태동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저자도 이 시장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뒤늦게 뛰어들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간절한 열정으로 늦은 나이와 경험부족을 극복했다. 그는 “간절하기만 하다면, 열정에는 만기도 유효기간도 없다”고 말한다.
사업에 대한 열정이 넘쳐 그는 한 때 건설업으로 외도를 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물류창고 부지가 개발 계획에 수용되는 바람에 대토로 상업용지를 받은 게 화근이었다. 부동산으로 쉽게 부를 축적하는 사례들을 보면서 박 회장도 무작정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사업 다각화’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파트 건설 및 분양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단 한번의 외도와 실패에서 그는 한 눈 팔지 말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몸집 불리기 보다 업의 본질과 그 핵심사명을 결코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 “선의의 경쟁으로, 앞선 경쟁자를 이겨라”
한일맨파워 설립 이듬해인 1988년 오사카에서 열린 ‘100엔숍 연합회’ 행사장에서 만난 야노 히로타케 다이소산교 회장은 박 회장에게 멘토이자 필생의 선의의 경쟁자였다. 박 회장은 7전 8기로 도전 중이던 그를 도와 일본 다이소가 지금과 같은 거대 기업으로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다시 실패하면 할복자살하겠다”는 결의, 그리고 물건을 보는 깐깐한 눈을 가진 그를 보면서 박 회장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때론 인격적인 모욕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박 회장은 25년의 협업 과정에서 크게 신뢰를 얻었다. 야노 회장으로부터 제품 독점 공급을 요청받는다. 제품력에 대한 믿음이 고마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거래가 깨졌을 때의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박 회장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한국에도 균일가숍을 차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아성 다이소는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1997년 서울 천호동에 ‘아스코이븐프라자’라는 이름으로 첫 문을 연 다이소는 나중에 야노 회장의 34%의 지분투자를 받게 된다. 이 후 사명도 일본과 같은 ‘다이소’ 브랜드를 쓰게 된다. 야노 회장은 브랜드 사용료도 받지 않고, ‘아성다이소’의 의장등록도 아성산업이 갖도록 배려했다. 주요주주라 판매수익금 배당금만 극히 일부 몇 차례 받아갔을 뿐이다.
◇ “현장 경영과 상생 경영을 펼치자”
박 회장은 다이소 창업 전에 13년 동안 생산현장의 책임자로 일했다. 때문에 누구보다 ‘현장’의 중요성을 잘 안다. 늘 현장을 챙기라고 독려한다. “현장이 알려주는 사소한 징후나 전조증상을 방치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며 직접 수시로 매장을 순회 순시한다. 불친절한 직원, 무관심한 직원이 손님을 몰아낸다며 ‘사나운 개가 지키는 주막에는 손님이 없어 술이 쉬게 쉰다’는 구맹주산(拘猛酒酸) 고사성어를 자주 언급한다. 매장은 물론 수송차량의 청결을 위해 물류센터에 무료 세차시설까지 갖췄다.
박 회장은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중요시한다. 협력업체가 잡기를 못 맞췄거나 불량제품을 만들었을 때 가장 손쉬운 ‘거래 중단’보다는 오히려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해 왔다. 그에게 협력업체들은 동료이자 파트너다. 다이소 제품의 70%를 이런 900여 국내 협력업체들이 공급한다. 업체당 연평균 거래액이 2017년에 이미 10억 원을 넘겼다. 박 회장은 “다이소가 성장할수록 국내 중소기업도 동반성장하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가능한 많은 물량을 사 주고 늘 현금으로 100% 결제해 준다. 인수합병은 그의 머리 속에 없다. 상생이 다이소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믿는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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